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독의 결단(함대 컬렉션) (문단 편집) === 절대국방권 === [[야마모토 이소로쿠|야마모토 사령장관]]의 전사 이후 코가 미네이치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부임하게 된다. 이미 일본의 전함 전력 조차도 [[무츠]]의 폭발과 히에이, 키리시마의 침몰로 소모되어가고 있던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한 회의에서 라바울에 대한 패전 원인을 분석하나 이구동성으로 비행기의 등장을 원인으로 꼽는다. 전쟁 이전 아카기의 생각대로, 그러나 그녀가 바라던 방향과 정 반대로 '''미국의 항공대가''' 점점 태평양의 하늘을 지배하기 시작하여 일본 해군으로써는 대응도 어려워졌기 때문. 해군은 이에 새로운 항공전대 사령부를 만드는 등 나름대로 대응에 고심하여 아무리 미 항모임무부대[* Carrier Task Force, 일본의 공모기동부대에 대응함]라도 한번에 받아내기 어려운 5000여기 이상의 항공기를 결전에 동원하려 한다. 두번째 문제는 수송선의 부족으로 인한 전선의 붕괴였다. 이미 민간으로부터 선박 징발은 동원력에 한계를 보이고 있었고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그마저도 육군과 해군이 어떻게든 갈라먹으려 했기 때문]]. 이번에는 육군에서 저자세로 라바울을 포함한 태평양의 섬들을 일부 포기하고 전선을 후퇴시키기를 요청하나,[* 육군은 5호 작전으로 중국군을 섬멸시키려던 계획이 [[중일전쟁|중국에 묶여있던 병력]]들을 [[과달카날 전투|과달카날에 들이밀었다가]] 심각하게 피해를 보았던 일로 취소됐기 때문에 자신들의 전선에서 현상유지를 원했다.] 해군에서 최대 거점인 라바울을 포기할수 없다는 방침을 고수하면서 제자리걸음만 한다. 반면 독일 역시 롬멜의 이집트 공격과 동부전선에서의 캅카스 공략이 좌절되며 미국이 본격적으로 [[무기대여법]]을 발동하자 통상파괴를 시도하며 일본에게도 인도양을 공략하여 동맹으로써의 의무를 지킬 것을 요구하였으나 일본은 [[개소리|자위적 전쟁]]의 취지에서 벗어난다며 이를 실행하지 않는다. 물론 연합군 측도 인도와 태평양에서 동시에 대일공세를 개시해야한다는 미국과 [[오버로드 작전|프랑스 침공]]에 더 집중해야한다는 영국의 의견이 갈리면서 고성이 오간다. 그러나 적어도 연합군 군부는 이대로 결론이 나지 않을경우 전쟁계획에 있어 아마추어인 [[프랭클린 루즈벨트|루즈벨트]]와 [[윈스턴 처칠|처칠]]이 전쟁계획을 주도할 것이라 보고 어느정도 합의를 본다. 반면 미국측은 드디어 [[에식스급 항공모함]]과 [[인디펜던스급 경항공모함]]이 전선에 배치되면서 어느정도 도찐개찐이었던 양측 항모전력[* 일본측은 미드웨이에서 1,2항전을 말아먹었지만 어느정도 수습이 가능했으며, 미국측은 전세를 뒤집긴 했지만 한때 태평양에서 가용가능한 항모가 없을 정도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의 저울추가 미군에 우세하게 기운다. [[히로히토]] 일본 천황은 유리하다고 장담한 전황이 어째서 이 모양이냐며 5개월이면 전쟁이 끝난다고 장담한 [[스기야마 하지메]] 육군참모총장과 [[하스누마 시게루]] 시종무관장, 수상 [[도조 히데키]]를 질책하고[* 여기서 군부가 천황에게도 전쟁의 분위기를 속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도조는 해군에게 어느정도 양보하더라도 협력하여 절대방어선을 만들 것을 약조한다. 43년 9월,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태평양에 파견되어온 [[루이지 토렐리(함대 컬렉션)|이탈리아 잠수함]]들은 전부 독일 해군에 인계된다. 맥아더의 미군과 호주 연합군은 뉴기니에서 대치하던 일본군의 후방 거점에 공수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장악하면서 전선이 붕괴되고 미 항모임무부대가 길버트 제도를 기습공격하였으며 호주군이 뉴기니 북쪽에 상륙하여 일본군에게 불리한 공방전이 벌어진다. 그나마 전쟁에 대해 가장 냉정한 평가를 내려왔던 [[시라누이(함대 컬렉션)|시라누이]]는 야마모토 사령장관의 죽음과 이호작전의 실패로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전쟁을 지속하는 의미가 없다고 보아 현재의 전황과 정치적인 현황을 정리하여 올리고 전선을 축소할 것을 요청하는 제안서를 올리고 육해군의 젊은 참모장교들은 거기에다 일본군 지휘권의 개혁과 육해군 통합참모본부의 창설을 골자로 한 제안서를 올린다. 그러나 여전히 육군과 해군 상부는 서로의 조직을 먹을 생각만 하고 있었고 담당참모가 제안을 너무 정직하게 올린것이 화근이 되어 '''독일이 독소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고 다음해 봄에 태평양에서 결정적인 전황이 찾아올 것'''이라는 예상을 상부에서는 "전쟁 질 준비나 하라는 말이냐"라며 반려해버린다. 제안서의 방어선 설정 필요성은 그나마 양측이 동의하여 '''절대국방권'''이 형성되었으나, 육군과 해군의 해석이 달라[* 육군은 이를 더 이상 뺏기면 안될 방어선으로 해석하였으나 해군은 이를 미군을 함대결전으로 격멸할 마지막 방어선으로 생각하여 해군측이 병력을 방어선 바깥으로 빼버린다.] 육군과 해군이 서로 다른곳을 절대방어선이라면서 쥐고있는 괴상한 모양새가 되었다. 그래도 방어선이 후방에 설정되자, 솔로몬 제도에서 일본군의 철수작전이 시작되었다. 콜롬방가라에서는 성공적으로 철수가 이뤄졌으나 베야라베야 섬에서는 일본군이 막다른 길에 몰려 구조요청을 타전한다. 상부에서는 구출 포기와 결별 전보를 보내나 3수전에서 철수작전에 응하면서 인근 미군의 DesDiv 4[* Destroyer Division, 구축부대, 일본군의 구축대에 대응]와 교전, 유구모가 전투불능에 빠져 침몰하나 미 구축부대의 피해가 커 퇴각한다.[* 이후 일본은 이를 순양함 셋, 구축함 셋을 침몰시켰다며 전과를 과장한다.] 유구모 본인은 의장을 잃고 간신히 몸만 살아남아 미군에 구조되나 항복을 거부하고 미군의 총에 죽으려 했지만 미군병사들은 유구모에게 비상식량과 물을 던지고 자기들 갈 길을 가버린다[* 여담으로 실제 유구모가 격침된 후 유구모의 승무원 70여명이 미군 어뢰정에 의해 구출된다. 이때 한 미군이 구출한 어느 일본군에게 커피를 건냈는데, 그 일본군이 숨겨놓은 권총으로 미군을 살해하는 사건이 터진다. 그 일본군은 곧바로 사살되었으며 분노한 미군은 다른 일본군들도 죽이려 했으나 어뢰정장의 만류로 넘어갔다.] 반면 미군은 카사블랑카급의 초고속 건조에 들어가 '주간 공모'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항공모함을 양산해대며 이렇게 불린 전력으로 웨이크섬을 공습한다. 이때 공습의 피해가 너무 큰 나머지 현지 일본군들이 분노하여 미군 포로를 학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본은 조종사의 긴급 확충을 위해 학도병들을 모집하였으나 이들은 사관학교 출신에게 하대를 받았으며 최전선이나 '''[[카미카제|특공대]]'''로 보내졌다. 정보전에서도 이미 일본의 암호를 꿰고있던 미국과 달리 해독능력이 떨어지던 일본측에서는 미군의 무전빈도를 통해 내용을 예측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여기서 마셜 제도로 미군이 향한다는 정보를 얻어 드디어 함대결전에 돌입하나 했지만 주먹구구식 정보의 한계로 미군의 위치를 잘못 계산하여 허탕으로 끝나고 이 기동 한번으로 트럭섬의 비축연료 수십만 톤이 한번에 바닥나 '연합함대의 거창한 산책'이라는 오명을 얻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합군이 부겐빌 공략에 들어가면서 일본군도 대응으로 로호작전을 개시하였으나 습격부대가 미군에게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면서 센다이가 굉침, 부겐빌 섬에 들어간 공습은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역으로 홀시의 심기를 건드려 라바울에 대규모 공습이 벌어진 탓에 수많은 함선이 피해를 보고 미군측의 피해는 고작 함재기 10기에 불과했다. 일본군의 전황이 전혀 좋게 돌아가지 않는 이 와중에 도조 히데키는 '아무래도 아시아 해방을 부르짖는 일본이 식민지를 가지는건 이상하다.'는 논리로 버마와 필리핀을 독립시키기로 결정, 중국 괴뢰정부의 [[왕징웨이]], [[만주국]]의 장징휘, [[필리핀]]의 호세 라우렐, [[버마]]의 바 마우, [[타이]]의 완 와이타이쿤, [[자유 인도 임시정부]]의 [[찬드라 보세]]를 초청하여 백인들을 제외한 아시아인들만의 국제 회의를 결성한다. [[이중잣대|물론 일본에게 필요한 석유, 고무 자원지대인]]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브루나이]]는 독립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 사이에도 미군은 세배나 증강된 병력으로 라바울을 공습으로 탈탈 털어버렸으며, 결국 구사카 류노스케 참모장이 트럭섬으로 함선들을 퇴피시키고 71기의 기지항공대로 보복공격을 가했으나 미군은 이미 대공[[레이더]], [[조기경보기]], 전투초계(CAP), VT 신관등을 총동원하여 일본군 공격기를 전멸시켰으며 피해는 전혀 없었다. 코가 사령장관은 [[정신승리|어쨌든 미군에게 피해를 입혔다며]] 로호작전을 종결하였으나, 그간 즈이카쿠와 쇼카쿠가 재편성한 1항전에게서 빼간 항공기 70%, 승무원 절반을 상실한 빈껍데기로 돌아오고 만다. 악화되는 전황에 통상항로를 보호할 배들까지 남방에 징발해가자 결국 조선과 일본 사이의 만주 식량 루트에 미군 잠수함이 출몰하여 일본군은 항로에 기뢰를 까는 식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미군이 동해상의 통상파괴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아 어느정도 효과가 있긴 했으나 남방에서의 선단호위에는 너무 넓고 기뢰를 대소련 전략예비물자로 분류하여 얼마 내려오지 않아 영 도움이 되지 않는다. 11월, 미군이 중부 태평양에서 [[타라와 전투|대규모 침공작전]]을 벌이기 시작하자 일본군도 이에 대응하여 함대결전 Z작전 병작전 제3법을 실행하나 전함에게는 연료가 없었고 중순은 피해가 커 전부 입거했으며 항모에게는 함재기가 없었다. 일본군은 어쩔수 없이 경순과 잠수함을 중심으로 결전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즈이카쿠의 남은 항공대가 분전하여 공모 8척을 격침했다는 엄청난 소식이 들어오나 언제나 그랬듯이 허위보고였고 실제로는 인디펜던스에 어뢰 한발을 맞춘 것에 불과했다. 그나마 주력이었던 경순들은 미군의 상륙작전이 끝난 뒤에나 도착하여 퇴피해야했으며 점감요격에 나선 잠수함들은 산개선을 설정하여 그나마 전과를 올렸으나 대잠체계가 확충된 미군에 모조리 갈려나갔다. 전후 잠수함부대 출신이었던 [[체스터 니미츠]]는 잠수함을 왜 이렇게 써먹었냐며 황당함을 금치 못했으며 나가노 군령부 총장을 심문했으나 자신은 잠수함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답변만 얻게 된다. 결국 미군은 일본군과 조우하는 일 없이 타라와 등의 섬을 장악하였으며 부겐빌에서 미군의 비행장이 만들어져 비스마르크 해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으나 코가 사령장관은 '''[[정신승리|어쨌든 미군 기동부대가 돌아갔으니 격퇴한 것이고 Z작전은 황군의 승리]]'''라면서 결전태세를 끝내고 대형함들을 본토로 돌려보낸다.[* 문제는 여전히 미해군 TF-50이 남아있었다는 점이고 이들은 일본군이 돌아간 틈을 타 마셜 제도를 공습한다. 그러나 여기서 미 항모가 피습되고 목표를 완수한뒤 모항으로 귀환하자 이마저도 일본군은 항모를 격침했다는 허위 보고로 또 자신들이 승전했다고 착각한다.] 일본 내에서는 오랫만에 결전에서 승리하였다는 소식에 축제 분위기로 바뀌고 히로히토 천황은 코가 사령장관에게 분전을 축하하는 칙어를 하사한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오판이었냐면 미군들은 애초에 타라와 상륙작전을 위한 함대운용 정도로 생각했고 이걸 함대결전이라고 칭하는건 일본군의 장대한 착각일 뿐이었다. 그리고 일본 육군은 이 소식을 듣고 '미군이 더 이상 중국에 개입하지 못할거다'라고 생각하여 소련을 상대하기 위한 전략예비대였던 관동군을 빼다 중국에 들이붓는다.(그 결과 1945년 8월 초 소련이 만주를 공격했을때 관동군은 빈껍데기만 남게 된다.) 얼마 뒤 미군은 마셜 제도의 공격을 위해 진지하게 쳐들어오나 정작 이에 대응해야할 일본 해군은 결전이 끝나 함대의 재편성에 들어갔고 미군에게 거점들이 모조리 박살나는걸 구경만 해야 했다.] 구축함들은 해상호위로 돌려진다. 유키카제와 아마츠카제는 해상호위총사령부로, 반면 시라누이는 신설된 9함대에 단독으로 웨이크섬으로 배속된다. 그 와중 영국과 중국, 미국은 [[카이로 회담]]을 발표하였고 날뛰는 중국을 응징하자는 명분으로 전쟁을 시작한 일본 육군은 이에 분개, 미국이 한동안 활동하기 어렵다는 해군의 보고를 믿은 육군은 만주의 관동군을 빼서 중국에 투입, 대륙타통작전과 인도의 보급선을 끊기 위한 [[임팔 전투|우호작전]]을 승인한다. [[장개석]]이 돌아간 뒤, 영미는 이번에는 스탈린과 테헤란의 소련 공관에서 [[테헤란 회담]]을 개최하며 이곳에서 [[오버로드 작전]]의 조율과 소련의 대일 참전 약속이 이뤄진다. 일본 해군의 칸무스들은 소모된 전력을 보충하며 솔로몬에서 미해군을 격멸하고 승리하였다는 소식에 취해 연합군의 '일본의 무조건 항복' 강요를 무시하며 비웃으나 애초에 어처구니없는 수준의 허위보고를 믿지 않았던 시라누이는 현실적으로 겨우 비행기 100대로 미군을 격멸하고 이제 중국과 인도를 정복한다는게 말이 되냐며 질타하며 떠나가 버린다.[* 이 모습을 본 다른 칸무스들은 그냥 시라누이가 좌천되어서 기분이 상해서 저런다고 넘겨 짚었다.] 반면 해상호위총사령부에 새로 배속된 유키카제와 아마츠카제는 일본의 해상호위를 전담하는 부대의 호위함 주력이 '''해방함'''인데다가 구축함은 이제 전근온 둘이 전부고 호위항모랍시고 치토세급 둘이 붙은게 끝인데다 중요한 호위가 아니면 수송선들을 내팽개쳐둔다는 말을 듣고 뭔가 잘못된게 아닌가 의심한다. 1943년 말, 이 시점에 남방에서 석유 670만톤이 생산되고 563만톤이 소모되었으며 1944년 일본군이 가용가능한 석유는 고작 187만톤에 불과했다. [각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